
오늘은 오후 내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벽을 따라 걸었어.
한 때 베를린을 둘로 갈라놓았던 그 벽은 내 마음속에 굳건히 서 있는 벽을 상기시켰고,
수많은 질문을 던졌고, 온전한 각성을 요구했어.
부서진 조각의 파편들 속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 네가 알고 있는, 내가 봉인해버린 기억들이었어.
그리고 비로소 나는 깨달았어.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지.
나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나는 그 기억들로부터 도망치는 데 내 대부분의 삶을 바쳤지만,
기억들은 오히려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나의 목을 졸라 모든 것을 모조리 실토하게 만들리라는 걸,
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나는 내가 지녔던 그 감정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 생각도 없고, 용서받고 싶지도 않아.
단 하나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좀더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거야.
나 자신을 좀더 아끼고 사랑하지 못했다는 거야.
좀더 나를 생각했다면, 좀더 나의 욕망에 충실했다면,
좀더 나를 표현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애를 썼다면,
비록 그 결과는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나의 과거와 진실에 대해 떳떳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너를 다시 만났을 때 모든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비오, 나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이 벽이 부서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 길이 끝나는 것처럼,
언젠가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단단한 벽도 무너지게 될거야.
세상에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이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비오, 너에게 가장 먼저 모든 이야기를 들려줄게.
네가 듣고 싶어 하는, 그리고 네가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들을.
베를린에서, 시에나. / PAPER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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